자유한국당 부산해운대구 예비후보자 김미애 인터뷰



-지역민과 지지자들을 대거 참석한 가운데 선거사무소 개소식을 가질 텐데, 발 빠른 행보가 아닌지요?
“저는 작년 10월에 자유한국당 부산시당 수석부위원장직을 수락하면서 정치를 하겠다고 공표하였습니다. 그 후 올 해 1월에 해운대구을 당협위원장을 맡아 반송 반여 재송동 재래시장, 경로당, 각 동 구석구석을 다니며 지역민들과 호흡했습니다.


예비후보 등록도 첫날에 바로 했습니다. 어차피 내년 총선에 반드시 승리하여 자유 대한민국을 지키고 미래를 준비해야하는 사명감으로 시작하였기에 선거사무소 개소식을 늦출 이유가 없습니다. 저는 어떤 일도 보여주기 식으로 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에 제가 준비되었다면 바로 알리고, 승리의 그 날까지 앞만 보고 전력질주 하는 게 맞다고 여깁니다.”



-초청장 인사 내용을 보면 “반여동 방직공장의 여공으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고 예비후보자님의 과거를 서슴없이 소개 하셨는데, 어떤 뜻이 담겨 있는지요?


“저는 중2 때 엄마가 돌아가셨고, 이후 경제적 어려움이 극심했습니다. 포항여고 1학년 때 학교 갈 차비가 없어 더 이상 학교를 다닐 수 없었습니다. 구룡포에서 겨우 차비만 마련하여 부산에 왔고, 반여동 태광산업에서 3교대 공원으로 사회 첫발을 내디뎠고, 이후 20대에 식당운영 등으로 돈 3천만 원을 모아 29세에 동아대법대 야간에 들어가 대학 4학년 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고, 사법연수원 수료 후 37세부터 지금까지 변호사를 하고 있고, 이제 입법 활동을 위한 길목에 섰습니다.


바로 이것이 제 인생입니다. 저는 제 인생처럼 제 꿈을 이루고 사랑하는 부산, 그 중에서도 해운대구 을지역을 주거, 도로, 공원, 문화 예술 등이 어우러져 아이에서부터 어르신 모두 살기 좋은 도시를 만들고자 하는 비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제가 무에서 유를 창조해 냈듯이 반드시 실천해 낼 것입니다.


또한 지금 우리 사회는 희망사다리, 공정사다리, 계층이동의 사다리가 내려앉은 상황인데, 고군분투하는 청년들에게 제가 사다리가 되겠다는 약속을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어떤 환경도 당신의 꿈까지 가둘 수 없다’는 사실을 제가 증명했듯이 앞으로도 그런 세상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것입니다.”


-이어 초청장에는 “자유대한민국의 가치를 수호하고 해운대의 미래발전을 꿈꾼다”고 하셨는데, 예비후보자님의 비전전략이기도한 ‘자유대한민국의 가치와 수호’, ‘해운대의 미래발전’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신다면?


“만약 제가 1969년에 자유 대한민국이 아닌 북한에서 태어났다면 지금 저는 어떤 모습일까요? 아마 평양 부근에서 태어나 잘 돼야 장마당에서 물건을 팔고 있을 것입니다. 저는 건국 당시부터 자유민주정을 택한 이승만 대통령, 그리고 전 국민을 배고픔에서 해방되도록 산업화를 이룬 박정희 대통령을 존경하고, 그런 대한민국에서 제가 꿈을 이루고, 제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사실에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런 토대가 현 정권에 이르러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제가 목숨 걸고 지켜야하는 사명입니다.


해운대의 미래발전은, 주거, 도로, 공원, 문화 예술, 일자리 등 모든 면에서 열악한 해운대구을 지역을 17세 김미애의 마음으로 돌아가 5년, 10년, 30년, 50년 미래를 꿈꾸고 비전을 가지고 아이부터 어르신까지 주거에서부터 문화예술로 융성한 미래형 도시를 만들겠다는 다짐입니다.”





-1년 전 자유한국당 해운대구(을) 당협위원장을 맡아 지역을 누비며 선한 영향력을 끼쳐 온 것으로 압니다. 지역 속에서 봉사와 섬김을 통해 주민의 목소리를 경청하셨을 텐데, 요즘 이슈가 되는 주민들의 목소리를 소개하신다면?


“제가 10대, 20대, 30대를 반여동, 재송동에서 주로 보냈습니다. 먼저 지역 구석구석을 누비며 민생현장을 살폈습니다. 재래시장 활성화를 위하여 ‘해장쿡(해운대 장바구니 cook)운동’( 재래시장을 직접 이용하며 시민들의 고충을 직접 듣고 해결을 위한 노력을 하겠다)을 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상인들과 친해지고 소통의 기회를 넓혔습니다. 명절이나 특정한 날에만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찾아가는 모습을 보며 상인들과 횟수가 늘어날수록 친근해지고 신뢰도 높아져갔습니다.


우리 지역에는 경제적으로 곤궁한 분들과 어르신들이 많습니다. 특히 무료급식 봉사를 하는 사찰과 교회도 많아, 시간될 때마다 찾아가 급식봉사를 하면서 어르신들의 어려움을 피부로 느꼈습니다. 한여름에는 경로당을 돌며 어르신들이 불편함은 없는지 살피고 바로 전화로 a/s신청을 해드리거나 직접 고쳐드렸는데, 어르신들로부터 박수를 받기도 했습니다.


태풍이 지나고 간 다음날은 구의원과 함께 지역을 한 바퀴 돌면서 취약지역 및 개선사항을 파악하고, 시정을 위한 노력을 했습니다.
초중고 학부모들로부터 대입제도 관련한 의견을 듣기 위하여 간담회를 개최하였는데, 대부분 학생부종합전형 및 수시전형을 폐지하고, 정시 확대를 요구하였습니다. 이를 제가 이사위원인 자유한국당 저스티스 리그에 전달하였고, 부산에서도 대입제도 개선 공청회를 개최하였는데, 그 결과 정시확대 50%이상을 당론으로 채택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나라 공동주택 거주비율이 70% 이상입니다. 제가 아파트 동대표 및 감사를 하면서 연간 관리비로 승강기유지보수비에서만 1억 8천만 원을 줄인 경험 등 변호사로서 전문성과 책임감이 주민들에게 신뢰를 주고 있습니다. 특히 공동주택 관련한 각종 민원이 생길 때마다 토로하는 지역주민들께 해결 방법론을 알려드리며 함께 풀어나가기 위한 노력을 했습니다.


지역에서 발생하는 각종 현안, 계룡이슈빌 소유권이전등기 문제, 송수중학교 설립 희망, 반여초 통폐합 관련한 민원, 센텀2지구 개발 지연 등에 대하여 주민들의 목소리를 듣고 논문과 각종 자료를 조사하여 방법론을 함께 고민하고 나은 방향을 모색해 왔습니다.


문제를 가지고 내방한 주민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어떻게든 실질적인 도움을 드리려고 노력했고, 당장 해결이 안 되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해결을 위한 방법을 함께 모색하고 당사자를 설득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안내해 드리며 늘 주민과 함께 호흡하려 노력했습니다. 이로 인해 지역주민들이 저에 대한 신뢰가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잘 나가는 변호사님께서 골머리가 아픈 정치를 안 하셔도 먹고 살만 하실 텐데, 이를 충분히 인지하시고도 정치에 입문하게 된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지요?


“저는 참 행복한 변호사요, 엄마였습니다. 지금 15년차 변호사인데요. 저는 변호사를 하면서도 큰 사건보다는 정말 가난하고 소외된 사회적 약자들 사건을 많이 했습니다. 형사국선 및 소년보호사건 국선보조인, 부산변호사회 여성아동 인권위원회를 만들어 직접 소년원, 미혼모쉼터, 입양기관 등을 다니며 어려움을 듣고 도움을 드리기도 하였고, 미투법률지원단장으로 성폭력피해자를 지원하고, 어린 자녀를 둔 가정폭력 피해자를 지원하는 등 구석구석 현장에서 활동했습니다.

2012년 8월부터 시행된 현행 입양특례법인 입양을 위해서는 반드시 출생신고를 해야 하는 탓에 낙태 증가, 불법입양 증가, 베이비박스 등 유기아동 증가 등 결국 아이들의 생명을 앗아가는 일이 늘어나는 것을 보고, 법개정운동을 전기했지만 아직도 성과가 없습니다.

국민 70% 이상이 공동주택에 거주하면서 참 많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저도 입주자대표회의 감사를 하면서 승강기유지보수비만 연간 1억 8000만원을 줄였는데, 그 과정에 입주민들의 관심부족 및 모함, 관리감독관청의 소극적 행정 등으로 1년 이상 힘들었던 경험이 있습니다.

또 제가 워킹맘이자 싱글맘으로 두 아이를 키우는데요. 특히 유아기부터 초등학교 저학년까지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의 공통적인 문제는 양육입니다. 예고 없이 직장일이 늦어지기고 하고, 예고 없이 아이가 아프기도 합니다. 그때마다 워킹맘 워킹대디들은 노심초사하게 되는데, 이를 국가나 자치단체가 이제 보조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부산변호사회 수석부회장 겸 인권위원장을 하면서 직장 어린이집 설치를 위한 TF팀을 구성하여 노력했는데, 가장 중요한 장소구하기가 힘들어서 보류하게 됐습니다.

이러한 일들을 겪으면서 법률 제·개정이 선행되어야 하고, 여기에 경험과 열정, 그리고 전문성있는 국회의원 한 명이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에 이르렀고, 결국 제가 나서게 된 계기이기도 합니다.”

-국회의원 후보자로 공천을 받게 되면 지역민들에게 어떤 공약을 내세워 파고 들 것인지?


“국가적 과제로써 ▲국가와 자치단체가 보조양육자로서 돈을 주기보다 아이를 키워주는 시스템을 만들자 ▲현행 민법 상 친양자 입양은 심각한 사회혼란을 초래하고 입양특례법이 오히려 입양을 막는 악법이므로 개선이 요구되는 바 입양법 전체 정비 ▲공동주택 문제입니다. 지역적 과제로는 ▲센텀2지구 개발 ▲문화예술 불모지인 해운대구 을지역을 문화예술 융성 ▲지진이나 화재에 너무 취약한 주거환경개선 ▲선진화 사회에 진입한 지역문제 해결 ▲한진 CY부지 개발에 수요자인 주민 의견을 적극 반영하는 것 등입니다.”

-독실한 기독교인입니다. 수영로교회 집사이며 오랫동안 주일학교 교사로 섬겨 왔으며, 변호사로서 바쁜 일정을 보내면서도 휴가를 이용해 해외선교 봉사활동을 왕성하게 펼쳐왔습니다. 쉽지 않은 사역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따라서 받은 은혜를 섬김으로써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고등부교사, 영아부 및 유아부 부감을 하였고, 제자 중에는 목사 및 사모도 배출되었는데, 큰 보람입니다. 봉사 역시 받은 은혜를 홀로 누린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을 것이고, 어떤 방식으로든 나누려 애쓰고 있습니다.”



-중2 때 어머니를 보내고, 가난에 못 이겨 포항여고를 자퇴하고 무작정 친구 따라 부산행 버스에 올라 20대를 여공으로, 그리고 29세에 동아대 법대 입학, 사법고시 합격, 싱글 처녀가 입양으로 엄마가 되는 인생역경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예비후보자님의 내면에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 은혜로 된 것이라“고 고백하셨습니다. 성장과정을 간략하게 간증해 주시죠?


“이미 질문에도 있듯이, 초등 5학년 때 엄마가 암말기로 병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후 마지막으로 저와 함께 찾은 것이 예수님이었습니다. 이후 저는 오직 엄마를 낫게 해달라는 기도를 드렸고, 거동을 못하는 엄마를 리어카에 태우고 교회를 다녔고, 돈 한 푼 없어 노점상을 하기도 하였고, 중2 때 엄마가 돌아가신 후에는 외로움과 두려움이 절정에 달했습니다. 그 아픈 경험이 엄마 없는 아이들에 대한 각별한 마음이 생겼고, 그것이 변호사가 된 이후 전 세계 수십 명의 아이들을 물질적으로 돕기도 하였고, 소년원에 찾아가 아이들에게 다시 꿈꾸게 하는 운동을 하였고, 제 아이도 키우고 있습니다. 고아와 과부와 함께 하신 예수님의 마음처럼 가난하고 낮은 자들과 함께 하는 것이 예수님의 제자 된 삶이라 여깁니다.



-기독인으로서 정치의 소신을 피력하신다면?


“오직 국가와 국민만 바라보며 깨끗하고 올곧은 참정치를 실천하겠습니다. 국회의원이라는 자리가 아니라 입법기관으로서 역할에 충실하고 싶습니다. 15년차 변호사로 사회 구석구석 사회적 약자들을 살피고 정책이나 환경개선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소년원 및 소년분류심사원, 미혼모쉼터, 입양시설, 가정폭력 및 성폭력 피해자, 경로당, 장애인단체, 국민 70% 이상이 거주하는 공동주택 문제 등 현장을 찾아가고, 성명을 발표하고, 신문에 칼럼도 쓰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발언했지만 변한 게 크게 없습니다.


또한 싱글맘이자 워킹맘인 제가 아이 두세 명을 직접 키우면서 자녀양육은 부모에게만 맡겨서는 저출산문제가 극복되지 않음을 절절히 경험했기에, 이제는 국가와 자치단체가 보조양육자가 되는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 것입니다. 결국 입법기관인 국회의원 한 사람이라도 구체적인 경험과 강한 의지가 있어야 법을 바꾸고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절실한 경험이 저를 국회로 보내도록 부추긴 것입니다.”


<송상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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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안경찰 / 유풍식 기자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