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쁘다고 배우 됐지만…배우는 이쁘면 손해”

한국영화 100년 ‘아이콘’ 김지미

“17살에 배우가 뭐하는 직업인지도 모르고 시작했죠. 사실 저는 이쁘다는 타이틀만 갖고 여배우가 됐어요(웃음). 근데 이쁘면 손해예요. 화면에서 이쁜 것만 보지 전체적으로 못 보는데, 연기를 특출나게 하려면 이뻐선 안 돼요.”


▲ 부산국제영화제 행사 참석차 귀국한 김지미가 5일 한국영화 100년과 자신의 충무로 인생을 돌아보는 소회를 말하고 있다.

한국 영화계의 살아있는 전설, ‘원조 팜므파탈’ 김지미(79)의 푸념 아닌 푸념에 부산 남포동 비프(Biff)광장 야외 객석에 웃음보가 터졌다. 5일 오후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 특별행사로 마련된 ‘김지미를 아시나요’ 오픈 토크에서다.


토크쇼 직전 야외 스크린을 통해 그의 전성기 출연작 ‘장희빈’(1961, 감독 정창화)이 상영되자 길 가던 시민들이 “아유 곱다” “저 눈에 독기 좀 봐” 하며 흑백 영상에 빠져들었다. 갑작스러운 비로 인해 30분짜리 행사를 조금 일찍 끝낸 그와 인근 카페에서 마주 앉았다.

Q : 사흘 연속(6일까지) 토크쇼를 열었는데.
A : “미국 LA에서 지난달 26일 들어와 속초에 갔다가 부산으로 왔다. 전야제에다 입장식에다 매일 몇 시간씩 다니다 보니 목이…. 그래도 부르는 데 안 갈 수가 있나. 야외 토크는 처음이라 새롭더라.”


Q : 부산영화제 공식 행사는 2010년 배우 회고전 이후 9년 만이다.

A : “사실 마음이 상해 있어서 그때 (회고전) 안 하려고도 했다. 그런데 나랑 같이 고생 많이 하며 영화제 출범에 앞장섰던 김동호 당시 집행위원장께서 ‘영화계가 어렵다, 살리자’고 요청했다. 이번에도 이용관 (부산국제영화제) 이사장이 올해 한국 영화 100주년이라며 초청해 또 이렇게 왔다. 이제 후배들 도와주는 것 외에 내가 뭘 더 하겠느냐.”


그가 ‘마음이 상했던’ 것은 소위 ‘영화계 신구 갈등’으로 불리는 2000년대 초 ‘영진위 사태’의 앙금을 말한다. 당시 새로 출범한 영화진흥위원회 집행부 인선 및 운영을 둘러싸고 그가 이사장으로 있던 영화인협회 측과 후배 영화인들이 갈등을 빚었다. 그는 2000년 6월 협회에 사표를 내고 LA로 떠난 뒤 한국 영화계에서 손을 뗐다. 1957년 덕성여고 재학 중 ‘황혼 열차’(감독 김기영) 주연으로 데뷔해 배우·제작자·협회임원 등으로 43년간 종횡무진으로 움직였던 이력에 갑작스러운 종지부였다.


Q : 아직도 서먹한 게 있나.
A : “그럴 게 뭐 있나. 나는 영화가 잘 되길 바라는 사람일 뿐이다. 다들 영화에만 전념했으면 좋겠다.”

올해 부산영화제 회고전 주인공은 정일성 촬영감독(90)이다. 정 촬영감독은 20대 후반에 충무로에 입성해 130여 편의 영화를 찍으며 ‘촬영을 예술 경지로 끌어올렸다’고 추앙받았다. 김지미와도 ‘육체의 약속’(1975) ‘비구니’(1984) 등 여러 작품을 함께 했다. 김지미는 “(전날 열린 회고전의 밤 행사에) 생각보다 후배 감독·배우들이 많이 안 보였다”며 “대한민국 최고 촬영기사의 일종의 진갑 잔치 같은 건데 아쉽더라”고 했다. “영화계가 삭막해졌나 싶다. 많은 영화인이 소외당하고 있다. 선배들이 어떤 고생을 해서 오늘 영화계가 호황을 누리게 됐나, 그런 걸 뒤돌아볼 수 있어야 할 텐데….”


Q : 연기 외에도 80년대 영화사 지미필름을 설립해 ‘티켓’‘명자 아끼꼬 쏘냐’ 등을 출연·제작했고 90년대 이후 영화인협회 이사장, 스크린쿼터 사수 범영화인 비대위 공동위원장, 영진위 위원으로도 활약했다.
A : “하다 보니 마치 떠밀리는 것처럼 여기저기 일해야 했다. 싸울 일도 많았다. 행정부 규제에 업자들 농간에 영화법도 개정해야지, 스크린쿼터 투쟁까지. 마지막에 관두고 나니 ‘아 이렇게 편한걸’ 싶더라. 영화 더는 안 한다 했는데도 LA까지 시나리오가 왔다. 딱 끊고 나니 몸도 마음도 편하고. 그동안 못 살았던 엄마·할머니로서의 삶을 만끽하고 있다.”
LA엔 형제들 외에 딸 둘(홍경임, 최영숙)과 손자들이 정착해 살고 있다. 김지미는 적게 먹으며 ‘1일5식’ 하고 별다른 운동 없이도 건강을 유지한다고 했다.


Q : 한국 영화는 좀 보나.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은.
A : “못 봤다. 한국 영화 잘 만들고는 있는데, 사실 요즘 별로 안 본다. 너무 액션·폭력·범죄물이 많다. 영화는 사회의 거울인데 ‘재미’로만 될 일인가. 좀 더 다양해야지. 이게 다 투자회사가 주도해서 그렇다. 투자사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다 보니 편향되는 것 같다.”
김지미는 네 번 결혼하고 이혼했다. 홍성기(1928~2001) 감독과 배우 최무룡(1928~1999), 가수 나훈아(72)에 이어 1991년 의사 이종구(87) 박사와 부부의 연을 맺었지만 11년 만에 파경을 맞았다.


Q : 여자의 연애는 언제까지인가.
A : “능력 있으면 할 수 있지. 밥 얻어먹으려고 생각하면 안 되고. 내 연애? 난 이혼하고 끝이지, 더는…. 나는 ‘꿈을 100% 살리려면 가정에 얽매여서 이루지 못할 수 있으니 장래를 잘 선택하라’고 한다. 예전엔 결혼이라면 ‘이 생명 다 바쳐’ 어쩌고 했지만 요즘은 다 각자 선택이다.”


인터뷰 자리에 머리가 희끗희끗한 70대 노신사가 꽃다발을 들고 조심스레 다가왔다. 부산 출신으로 현재 거제도에 거주한다는 그는 “1968년 부산 태화극장 재개관 행사 때 받은 사인”이라며 51년 묵은 메모지를 꺼냈다. 김지미는 환한 얼굴로 “여태 이걸…”이라며 다른 메모지에 사인을 남겼다. “다시 뵙게 돼 너무 영광이다. 건강하시라”는 팬의 인사에 은발의 김지미도 다정하게 손을 잡아주며 화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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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연예 / 이효정 기자 기자 다른기사보기